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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잡초의 생존 DNA가 주는 미래의 교훈
거친 환경이 깨우는 생존 유전자
AI 시대를 살아갈 사고와 적응력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김춘수 <꽃> 중
신임 장교들이 부임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부대원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이다. 소대장이 대원들의 이름을 불러줄 때, 생면부지의 상관은 친근한 존재가 되고 대원들은 ‘우리’라는 소속감으로 엮인다. 이름은 단순한 문자를 넘어 한 존재의 정체성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잡초’는 인간에게 쓸모없는 풀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소중한 작물의 양분과 햇볕을 빼앗는 주적과도 같다. 장마철 제초 작업을 하다 보면 내 안에서 불타오르는 증오심에 스스로 놀라곤 한다.
하지만 잡초에게도 고유한 이름이 있다. 쇠비름, 바랭이, 토끼풀, 여귀….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이름이 ‘울산도깨비바늘’이다. 울산항을 통해 들어온 외래종 귀화식물로, 바지가랑이에 붙어오는 재래종 도깨비 풀의 친척이다. 이 식물은 보통 20~50cm로 자라지만, 키가 1m가 넘는 메밀밭에 떨어지면 1m 이상 키를 빼올린다. 모든 생명체는 DNA 설계대로 형질을 발현할진대 어떻게 키를 고무줄처럼 2~3배나 늘렸다 줄였다 할 수 있을까?
도깨비바늘은 키 큰 메밀밭에서 광합성이 어려워지면, 그늘 신호를 감지해 잠겨 있던 ‘줄기 속성 생장 유전자’의 메틸화 자물쇠를 푸는 비상수단을 택한다. 키를 키우는 데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자리를 옮길 수 없는 잡초는 존망의 위기 앞에서 비상시 유전자를 가동하며 판을 뒤집어낸다.
반면 인간의 손에 길들여진 작물은 사정이 다르다. 수확 편의와 작업 효율을 위해 인간은 작물의 키가 균일하게만 자라도록 육종해 왔다. 스스로 유전자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야성’을 제거한 것이다. 비옥한 온실 속 고추 모종이라도 키 큰 메밀밭에 떨어지는 순간 아무런 반격도 못 한 채 시들어버리는 이유다.
인간의 키 유전자 역시 도깨비바늘처럼 환경 조건에 따라 형질 표현을 달리하는 ‘표현형 가변성’을 지니고 있다. 영양 상태, 수면, 스트레스에 따라 키가 달라지는 것이다. 다만 동물은 커진 골격에 맞춰 다른 조직이 무한정 늘어나는 데 한계가 있고, 환경이 나빠지면 이동할 수 있어 키 가변성의 폭이 식물만큼 넓지 않다. 이동할 수 없는 식물에게만 생존을 위한 넓은 가변성이 허용된 셈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뇌도 환경에 따라 더 발달할 수 있지 않을까? 현대 뇌과학은 인지적 자극이 주어지면 평생에 걸쳐 뇌세포가 자란다는 사실을 밝혔다. 뇌세포 유전자 역시 환경에 따라 자물쇠가 열리고 닫힌다는 이야기이다. 제러미 드실바 교수팀의 연구에 따르면, 수렵채집 시절 인류의 평균 뇌 용량은 약 1500㏄였으나 현대인에 이르러 약 1350㏄로 10% 이상 감소했다. 수렵채집인들은 감각을 동원해 정보를 수집하고, 리스크를 예측하며, 도구를 만들고 협업해야 살아남았다. 모든 자물쇠를 열어 뇌세포를 최대한 가동해야 생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반면 오늘날 우리는 절실하게 궁리할 이유가 줄었고, 타인을 만나는 것조차 불편해한다. 심지어 인공지능(AI)이 생각마저 대신해 준다.
세상은 날로 편리해지는데 역설적으로 불안감은 더 깊어진다. ‘생각하는 사람’이란 본질마저 침해받기 때문이다. 생각까지 대행해 준다면 뇌세포의 자물쇠는 영영 잠겨버리지 않을까? 알 수 없는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에게 우리는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 유발 하라리는 특정 기술 대신 ‘변화 적응력’과 ‘정신적 회복탄력성’을 길러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결국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해진 길을 따라 공부만 하면 되는 안온한 온실이 아니라,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하는 ‘거친 메밀밭’ 같은 야성의 환경이다.
UNIST에서 지역 중고생들과 함께해 온 ‘프로젝트 기반 멘토링 캠프’ 역시 이 고민에서 출발했다. 가상의 복합 문제를 팀 단위로 해결하는 이 캠프는 아이들에게는 체험해보지 못한 스트레스 환경이다. 자율주행 로봇을 직접 제작하며 실패와 성취를 경험하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과 생각하는 고통도 기꺼이 감수해야 한다. 생면부지의 또래들과 협력하며 팀워크를 맞춰 나간다. 아이들은 이 고통 속에서도 눈망울을 반짝인다.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순간 잠들어 있던 뇌세포의 자물쇠가 풀리며, 깊은 몰입에 빠지는 색다른 배움의 즐거움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미래가 요구하는 것은 어떤 거친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유전자 자물쇠를 풀어헤치는 ‘생존의 역량’이다. 생각의 고통을 견디며 길을 찾아본 아이들만이 어떤 세상이 오더라도 흔들리지 않는다. 잠든 뇌세포를 깨우고 생존 본능을 일깨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다음 세대에게 건네야 할 가장 강력한 무기다.
최영도 UNIST 리더십센터장
<본 칼럼은 2026년 8월 4일 경상일보 “[기고]잡초의 생존 DNA가 주는 미래의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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